[근대 서양 철학자의 이해와 비판] 근대 서양 철학자의 이해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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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데카르트,칸트,헤겔,훗설,비트겐슈타인의 잘된 요약정리와 비판
목차
Ⅰ.데카르트

Ⅱ.칸트

Ⅲ.헤겔

Ⅳ.훗설

Ⅴ.비트겐슈타인


참고문헌
본문내용
프랑스의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이며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처음 반대한 사람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직관이 확실한 지식임을 발견했다.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함 으로써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체계는 본유관념으로부터 이 성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직관주의적이나, 물리학과 생리학은 감각적 지식에 기 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죽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606년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훗날 프로테스탄트교를 탄핵한 자로 알려진 교부(敎父)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4년 푸아티 에에 가서 1616년 법학 학위를 땄다. 당시 푸아티에서는 위그노교도들이 루이 13세에게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다. 1618년 네덜란드 브레다로 가서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 공(公) 마우리츠의 평화시(時) 군대에서 15개월 동안 수학과 군사건축학을 배 웠다. 여기서 의사 이사크 베크만의 격려로 수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관한 소고Musicae Compendium〉(1618 저술, 사후 출판)를 썼다.
1619~28년 북.서 유럽을 여행했다. 보헤미아에 머물렀던 1619년 장차 인간의 권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1620년경에 이미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연역적 추론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
그는 자연에 대한 신지학적(神智學的) 지식도 검토했으며, 마술사 레이몽 륄과 연금 술사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했지만 독일의 수학자이자 장미십자회원인 요한 파울하버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1620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1세의 로마 가톨릭 군대에 몸담았다가 1662년 파리로 건너갔다.
이때 장 루이 게 드 발자크, 테오필 드 비오, 클로드 미도르주, 교부 마랭 메르센 등의 친구를 사귀었다. 특히 메르센은 일생 동안 수백명의 학자.저술가.수학자.과학자 등에게 서신을 보내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해준 박식한 사람으로, 데카르트가 더욱 광대한 지적 세계와 접촉하도록 만든 주요인물이었다. 데카르트는 저서를 출판하기 훨씬 전부터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데카르트는 1628년 과학에서는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개연성이 중요하다는 연금술사 샹두의 주장을 거부하고 확실성을 얻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했다. 예수회 체제에 맞서 1611년 오라토리오회 교육체제를 기초하고 평신도로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프로테스탄트교와 싸웠던 베륄 추기경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고 데카르트를 초대했다. 평론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베륄은 예수회의 토마스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데카르트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형이상학을 집필하도록 권고했다. 베륄은 데카르 트를 가톨릭에 귀의시키고자 애썼으나 결국 데카르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 란드로 떠나 거처를 숨기면서 16년 동안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교를 포함한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교의 박해가 심했던 프랑스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의 안식처였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루칠리오 바니니처럼신의 기적을 자연적으로 설명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거나(1619) 로마 가톨릭의 반종 교개혁에 충성하는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독창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 었다.
데카르트는 1629년 프라네커대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 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 a〉의 초안을 썼다. 1630년 라이덴대학교에 등록하여 의사 앙리 르네리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1631년 덴마크를 방문했고 1633~34년 의사이자 연금술사 에티엔 드 빌브 레시외와 함께 독일에 머물렀다. 의사 H. 레기우스가 1639년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데카르트의 견해를 가르치자 칼뱅주의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와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은 데카르트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데카르트는 1648년 〈뵈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는 같은 신을 숭배하 기 때문에 둘 다 신의 은총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용과 인권을 호소했다. 그러나 논쟁이 심화되자 데카르트는 프랑스 대사 및 친구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에게보호를 요청했다.
데카르트는 1633년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에서 우주론과 물리학을 다룬 〈세계 Le Monde〉(사후 출판)를 출판하려 했으나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 동설을 주장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훗날 교회가 유죄판결을 철회하면 출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출판을 자제했다. 교회가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물리학이 언젠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체할 것이라는 희망도 품었다.
1637년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을 출판했다. 이 책은 라틴어로 쓰지 않은 최초의 근대철학서이다. 〈방법서설〉의 각 부를 이루고 있는 세 논문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적 진리를 찾기 위한 이성의 사용법을 예증했다. 〈광학〉에서는 굴 절법칙을, 〈기상학〉에서는 무지개를 설명했으며, 〈기하학〉에서는 대수방정식으 로 기하학적 도형을 표현하여 지금까지 풀 수 없었던 많은 문제를 푸는 방법인 해석기하학을 제시했다. 또 기지수(旣知數)를 a, b, c 등으로, 미지수를 x, y, z등으로, 평면 체와 입방체를 포함한 기하학적 도형을 x2, x3 등과 같이 표현하는 관례를 도입하여 대수 개념을 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했다.
〈방법서설〉과 〈정신지도 규칙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1628 저술, 사후 출판)에서 데카르트는 추론의 4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즉 첫째, 자명하지 않다면그 어떤 것도 승인하지 말 것, 둘째, 문제를 가장 단순한 부분들로 세분할 것, 셋째, 단 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며 문제를 풀 것, 넷째, 추론을 다시 검토할 것 등이다. 이 규칙들은 수학적 추론절차를 직접 적용한 것으로, 데카르트는 각 문제의 핵심 개념과 한계는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법서설〉에서는 또 진리를 찾기 위해 사용해야 할 도덕률을 잠정적으로(나중에 최종적으로) 제시했다. 즉 첫째, 지방 관습과 법률을 지킬 것, 둘째, 최선의 증거 에 입각하여 결정을 내린 뒤 그 결정을 확실한 것으로 고수할 것, 셋째, 세계보다는 욕구를 변화시킬 것, 넷째, 언제나 진리를 추구할 것 등이다. 데카르트에게 모든 지식은 하나의 나무, 즉 형이상학이 뿌리, 물리학이 줄기, 의학.역학.도덕이 가지를 이루어 지식이라는 과일을 생산하는 나무와도 같았다.
1641년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을 라틴어로 출판했다. 책이 나오 기 전에 메르센은 얀센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앙투안 아르노, 영국 철학자 토머스홉스, 에피쿠로스주의 원자론자 가생디 등에게 책을 보냈으며 그들의 비평을 모아 〈반론과 응답 Objectiones Septimae〉(1642)을 출판했다. 〈반론과 응답〉은 독단이지배하던 시대에 철학과 과학에서 공동 토의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데카르트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한 번이라도 자기를 속인 적이 있는모든 형태의 지식을 일단 거짓으로 여기고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 곧 방법적 회의를제의한다.
첫째, 권위에 기초한 지식은 노련한 전문가들도 간혹 틀리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
둘째, 감각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때때로 착각을 낳으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추론에 기초한 지식은 가령 덧셈과 같이 가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믿을
수 없다.
넷째, 또 어떤 지식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경험하도록 하여 사람을 속이는악마나 꿈, 정신착란 등에서 오는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비록 속아서 사유하더라도 '내가 사유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직관만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코기토'는 하나의 특수한 사물 곧 자신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므로 논리적으로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코기토'는 단지 사유하는 사람만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정당화할 뿐이다. 만일 각자가 자기 자신이 존재함을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고 그밖의 모든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의심하는 데 그치고 만다면, 결국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사유뿐이라는 유아론(唯我論)에 빠지게 된다.
이 유아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데카르트는 '코기토'처럼 명석하고 판명한 모든 관념은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의 하나인 '코기토'도 미심쩍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명석하고 판명한 모든 관념은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
명석하고 판명한 본유관념(本有觀念)에 기초하여 데카르트는 각자의 마음이 정신적 실체이고 육체가 물질적 실체라고 확신했다. 마음이나 영혼은 비연장적이어서연장을 가진 육체처럼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는 까닭에 사멸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나아가 신이 존재한다는 점도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완전자로서의 신에 대한 본유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함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완전하 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이와 같은 존재론적 증명은 감각경험의도움없이 본유관념에서 출발하는 추론에만 의거하여 사물에 관한 지식을 확립하는데카르트의 합리론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을 속이지 않으며, 따라서 세계는 실제로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는 자신의 마음.신.세계 등이 존 재하기 위한 형이상학 기초를 놓았다고 선언했다.
신.무한.실체와 같은 관념의 경우, 경험 속에서는 만족스러운 기원을
참고문헌
칸트와 독일 이상주의
한국칸트학회 ㆍ 박필배

서양철학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문제
국민대학교어문학연구소 ㆍ 최종욱

근대유럽의 철학
성균관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ㆍ 박상환

Hegel 정치철학에 있어서의 소외개념
이화여대 대학원 ㆍ 김경순

헤겔과 근대정신
한국헤겔학회 ㆍ 이광모

역사적근거에 본 중국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점
성균관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ㆍ 양재혁

서양 과학 문명의 본질과 인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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