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에 대한 자료조사] 키케로에 대한 자료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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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키케로의 어머니 헬비아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훌륭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옷감을 표백하는 공장 일꾼의 아들로 자라났다고 말하고, 또 다른 역사가는 그의 족보를 툴루스 아티우스 볼스키 사람으로 툴루스 아우피디우스이다. 키케로의 집안은 그 집안에 있던 아르피눔, 즉 오늘날 이탈리아의 아르피노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툴루스는 볼스키 지방의 유서 깊은 가문으로, 로마 군과 싸워 뛰어난 공적을 쌓았던 사람이다. 플루타르크 지음, 이성규 역, 『어른과 청소년을 위한 플루타르크 영웅전 선집』, 현대지성사, 1998, pp.234~284, 이하 각주를 달지 않은 것은 이 책을 요약한 것임.

키케로의 어머니는 1월 3일에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오늘날 로마에서 관리들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며 제사를 지내는 날이 바로 이 날이다. 그런데 그의 유모의 꿈에, 지금 젖을 먹이고 있는 그 아기는 장차 로마에 큰 영광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대개 망상이나 꿈, 아니면 실없는 소리라고 생각해 버리기 쉽지만, 키케로의 경우는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즉, 그는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천재적인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부모들까지도 도대체 키케로가 어떤 아이인지를 보려고 학교에 찾아올 정도였다.
키케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방면에서 소질을 나타냈는데, 특히 시인으로서는 로마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웅변술에 있어서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 나타난 많은 천재적인 시인들의 빛에 가려 그의 시 작품들은 잊혀지고 말았다.
소년 시절의 학업을 마친 키케로는 곧 아카데미파의 철학자인 필로 카르타고의 학자인 클리토마쿠스의 제자. 필로는 아테네가 미트리다테스의 군대에게 점령 당하자 기원전 88년에 로마로 피난해왔다.
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필로는 클리토마쿠스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웅변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어서 로마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키케로는 또 원로원 의원이며 유명한 정치가였던 무키우스와도 가까이 지내며, 법률에 대한 지식을 넓혀갔다. 그리고 마르시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술라의 군대에 들어가 전쟁 경험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가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군주제로 옮아가게 되자, 그는 나라가 안정될 때까지 그리스 학자들과 사귀면서 학문을 연구하였고, 사색 속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 뒤 술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치적인 소란들은 조금씩 가라앉게 되었다. 그때 키케로는 한 소송사건에서 변호를 맡아 승리하게 되는데, 이 일로 술라의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진 키케로는 몸이 아파서 휴양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그리스로 여행을 갔다. 사실 그때 키케로는 몹시 야위어 있었고, 위가 약해서 음식도 많이 먹지 못하고 오후에 가벼운 식사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기는 했지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아서, 연설 도중에 소리를 너무 크게 지르면 저러다가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닐까 염려될 정도였다.
얼마 뒤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그는 적당한 운동으로 몸도 건강해져 있었고, 목소리도 잘 다듬어져 우렁차고 듣기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로마의 친구들로부터도 어서 돌아오라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도 정계로 나가라고 권유하였다. 결국 키케로는 큰 기대를 품고 다시 정치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어떤 신탁이 내려오는 바람에 그의 이러한 열기는 많이 식어버렸다. 그가 델포이에 가서 어떻게 하면 큰 명성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자기 천성대로 살아야지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신탁이 내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에 돌아와서도 모든 행동을 삼가며 관직에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두드러진 평가를 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에게 ‘그리스 사람’이니 ‘샌님’이니 하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원래 큰 욕망을 타고난 데다가 그의 아버지나 친구들의 권유 또한 열렬했으므로 변호하는 일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을 때 키케로는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강제로 식량을 모아 로마로 보냈으므로 섬사람들은 그를 무척 원망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공정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차차 알게 되자, 그들은 키케로를 지금까지의 어느 총독보다도 더 존경하게 되었다. 또 로마의 유명한 가문 자제들이 군대의 규율을 어지럽힌 죄로 시칠리아에 끌려왔을 때는 그들의 변호를 맡아 그들을 무죄로 석방시킨 일도 있었다. 그런데 키케로는 이러한 일들로 무척 뿌듯해 하며 로마로 돌아오다가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고 있다.
그는 캄파니아 온천과 정치가 유명한 로마 사람들의 휴양지
에서 로마의 명사가 된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키케로는 그 친구를 보고, 자기가 시칠리아에서 세운 업적에 대해 로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로마에서는 분명히 자신에 대한 칭찬의 소리들이 들끓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물었던 것인데, 그 친구는 뜻밖에도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지냈느냐고 되물었다. 이 말을 들은 키케로는 자신이 한 일이라는 것이 마치 로마라는 커다란 바다에 돌맹이 하나를 던진 것처럼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고 무척 실망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명예는 끝도 없이 아득하고 먼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보다 더 겸손해지게 되었다.
키케로의 재산은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리 넉넉한 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는 변호를 해주고 보수를 받지 않았으므로 그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신망을 다져준 것은 시칠리아의 정무관이었던 베레스의 변호를 맡았던 일 때문이었다. 베레스는 비리 때문에 시칠리아 시민들로부터 고발을 당했는데, 이때 키케로는 변호를 해준 것이 아니라 변호를 해주지 않음으로써 그가 유죄 선고를 받게 했다. 그때 법관들은 베레스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재판을 자꾸 연기하다가,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재판을 열었다. 그 날 하루에는 도저히 변호사의 변론을 끝내고 결말까지 지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키케로는 이 사건은 변론을 할 필요도 없다면서 곧 선고를 내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키케로는 정무관에 출마를 했다. 그는 이름난 여러 사람들을 모두 물리치고 가장 많은 표를 얻어 정무관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정무관을 지내면서 그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섰으며 사건들을 아주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리키니우스 마케르라는 로마 시내에서 제법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불법적으로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는데, 키케로가 이 재판을 맡게 되었다. 리키니우스 마케르는 석방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되었고, 이 말을 듣자 곧 집으로 들어가 침대로 쓰러지더니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 판결로 키케로가 얼마나 법을 잘 다루는지가 알려지게 되어 그는 더 큰 명예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키케로의 임기가 이틀 정도 남았을 때, 마닐리우스가 공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 일이 있었는데, 재판을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단 하루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평민들은 키케로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호민관들이 사람들 앞에 키케로를 불러내 그 책임을 물었다. 그러자 키케로는 자신의 임기가 하루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정무관에게 이 일을 미루지 않는 것이 마닐리우스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설명했다. 이 말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어 키케로를 칭찬하였다. 그래서 키케로는 이 사건을 맡았고, 폼페이우스의 과두 정치를 반대하는 자들을 날카롭게 공격하였다.
그 당시 로마가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는데 그 원인은 재산의 분배가 평등하지 못한 데 있었다. 즉, 귀족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향락과 제전, 선거 운동, 그리고 엄청난 건축물을 짓는 데 많은 재산을 써버렸다. 그렇게 해서 빠져 나간 돈은 모두 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병든 상태에 놓이게 된 고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동요가 일어나 금방이라도 전복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틸리나 자신의 딸을 범하고 자기 동생을 죽이는 등 악질적인 인간이었으나, 술라의 힘을 얻고 있었다.
가 집정관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리고 카이우스 안토니우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선출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사실 이 사람은 좋은 일에서든 나쁜 일에서든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를 이용하면 권력을 얻는 데느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명예를 존중하는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채고서 키케로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그러자 평민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서서 마침내 카탈리나를 물리치고 키케로와 카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 입후보했던 사람들 중 기사 출신이었던 사람은 오직 키케로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원로원 의원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집정관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카틸리나는 아직 음흉한 계획을 표면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집정관이 된 키케로의 앞길에는 커다란 암초가 놓여 있었다. 술라의 법률에 의해 공직에 나갈 자격을 빼앗긴 사람들의 그 숫자도 많았고, 그들의 세력도 아주 컸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민중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면서 계속 후보로 출마하였고, 술라의 전제 정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공격하는 내용은 정당한 것이었으나 어지러운 나라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호민관들도 10인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나라의 모든 권력을 맡기자는 새로운 법안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대해 귀족들은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도 이 위원회의 한 사람이 되
참고문헌
플루타르크 지음, 이성규 역, 『어른과 청소년을 위한 플루타르크 영웅전 선집』, 현대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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