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학] 조선중기의 정치운영방식과 이조전랑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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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차 례>
Ⅰ. 緖 論 Ⅳ. 郎官權의 실제
Ⅱ. 士林의 進出과 言論活動의 强化 Ⅴ. 結 論
Ⅲ. 郎官權의 形成

본문내용
Ⅱ. 士林의 進出과 言論活動의 强化

홍문관의 기능 확대에는 성종이 홍문관을 통해서 재상들을 견제하고 주도권 장악을 위한 지원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홍문관원의 적극적인 노력의 소산이었다. 어사파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유향소문제까지 제기했던 것에서 그들의 적극적인 노력을 잘 보여주는데, 이러한 동향은 홍문관의 언관화과정에서도 홍문관원들이 홍문록 인선의 정당성을 제기하고, 대간탄핵권을 적극적으로 확보해 가는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이러한 홍문관의 적극적인 동향에는 사림이 홍문관에 진출하여 훈구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홍문관 언관화 과정에서도 사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사림계의 인물이 홍문관을 장악한 것은 아니어서 사림계 인물만이 변화를 주도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홍문관의 기능변화와 그에 따른 언관의 정치력 강화가 사림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여타 홍문관원들의 지원하에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홍문관의 기능확대에 따라 언관권이 강화되면서 훈구에 대한 견제는 본격화되었고, 이에 훈구와 적극 대결할 수 있는 지방출신의 사림이 홍문록의 선발을 통해서 홍문관에 진입하여, 홍문관을 통한 사림의 정치진출은 더욱 빈번하였다. 성종 20년경부터 홍문관이 언관화되고 홍문관원의 대간진출이 관행화되면서 사림은 대간직에도 활발하게 진출하였다. 이러한 결과 성종 20년부터 연산군 4년 무오사화 직전까지 약 10년간 사림들은 주로 삼사를 거접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표출하였다.
홍문관이 언관화되고 삼사 언론의 정치력이 강화되면서 사림들의 진출이 강화되자, 언론을 통한 재상권의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동향은 당시의 언론활동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홍문관 언론의 양적인 면을 보면 집현전의 경우 보다 많아진 것으로 나타나나, 양사의 언론에 비교할 때에 미미한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는 홍문관 언관화의 기본성격이 양사를 지원하고 조정하는 것이었으며 직접 표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양적인 면에서의 변화는 성종 19년 이후 홍문관의 지원하에 되어지는 양사 언론의 획기적인 활성화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대의 대간의 언사는 홍문관 언관화 이후 획기적으로 활성화 된다. 여기서 탄핵과 인사의 대상인물은 거의 모두 당상관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당시 언론의 핵심이 훈구 대신들에 대한 견제였음을 잘 보여준다.
홍문관 언관화 이후 홍문관에서 양사를 규제할 수 있게 되면서 언론활동의 질도 높아졌다. 즉 핵심문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언관화 이후의 변화가 단순히 언론의 양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도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홍문관 언관화 이후 언사의 질적인 변화는 언론의 내용분석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오히려 이 측면에서 홍문관 언관화의 의미는 뚜렷이 나타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홍문관이 언관화 되고, 이에 따른 사림의 진출이 강화되면서 양과 질의 양면에서 言論權이 강화되고, 유교의 이념에 입각해서 왕이나 재상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자, 이에 대한 대응이 왕이나 재상들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는 홍문관을 통한 언권이 구체화되면서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언권을 인정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이즈음에 새로운 문제로 등장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대신은 股肱, 대간은 耳目으로 양자의 역할이 분리되어 규정되어 있었으나, 조선 초기에는 대신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이 규정은 관념에 불과하였다.
성종은 언론을 통해서 재상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홍문관을 지원하였으므로 삼사의 언론에 호의적이었고, 대간들이 주장하는 “언론은 군주의 권이면 대간의 권이 아니라”는 점에 기본적으로 동의 하였다. 그러나 재상들은 자신의 주도권 상실을 우려해서 언론의 강화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 한 예를 성종 21년 홍문관이 대간탄핵권을 갖는 것에 대해 대신들은 “權이 홍문관에 돌아가면 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적극반대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은 성종의 지원 아래서 기능이 더 강화되고 있었으므로 홍문관은 대간탄핵권까지 확보할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재상들의 권한은 위축되고 있었다. 이러한 재상들의 처지는, 대간들이 왕의 고문에 임하여서 재상들이 매번 承順에만 힘쓴다고 비난하자, “대신들이 할 말이 있어도 대간들이 공격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러하다”고 한 노사신의 발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홍문관의 언관화는 성종의 비호와 도움이 필수적인 것이었으나 언관화 이후 그 자체의 힘은 왕도 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성종의 긍정적인 태도로 양자의 마찰이 노정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다른 입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종의 권한이 모두 대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가”라고 대간의 언론을 비난하는 입장에 있었고, 나아가 “人主가 대간을 제어하지 못하면 威權이 대간에 있고 人主에 있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대간을 제어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입장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성종이 즉위할 때의 상황과 다른 데서 온 것이었다. 훈구의 위세 속에서 대간의 도움이 필요하던 성종과는 달리 연산군에게는 이미 재상들은 견제를 받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미 강력해져 유교적 이념에서 벗어나려는 자신을 견제하는 대간의 언사가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홍문관을 중심으로 한 삼사의 왕과 재상에 대한 대응은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강력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유교적 원칙에서 더욱 빗나가면서 언관과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提調制 비리 등으로 재상들과의 마찰역시 격렬해졌다. 이에 연산군과 재상들은 결속하여 사림을 공격하였고, 사림은 戊午士禍(1498)를 당하게 되었다. 결국 戊午士禍는 홍문관의 언관화 이후 야기된 정치구조의 변화에 대한 왕과 재상에 의한 반동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戊午士禍로 삼사를 포진한 사림들이 대거 피해를 입었고, 언론기능이 위축되어 언권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인해서 이들이 추구한 성과가 모두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체계가 관행화되어 있었으므로 타격을 입었지만 사화 이후에도 그 기능을 일정하게 하고 있었다. 연산군 7년(1501)에 연산군이 “예전에는 언론을 하는 자가 이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대간이 비록 물러나고자 하지만 홍문관의 제약을 받아서 자유롭게 할 수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은 戊午士禍이후에도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체계가 유지되었고, 일정한 기능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사림이 홍문관을 중심으로 추진한 언론권의 형성은 훈구권력의 남용이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치는 제문제의 주요 원인이 되었음을 생각할 때 선결 문제였다. 이는 비록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 단계의 진전을 위한 한 단계로서의 역할은 하였다고 생각된ㄷ. 그러나 戊午士禍로 인해서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는 언권의 한계가 분명하게 노정되었고, 이는 새로운 보완을 통해서 극복되어져야 했다. 이는 낭관권의 성립을 요구하는 정치상황이었는데,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朝鮮中期 士林政治 構造硏究』, 최이돈, 일조각, 1994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이수건, 영남대학교 출판부, 1979
『조선시대 정치사의 재조명』, 이태진, 범우사, 1985
『조선 성종조의 대간연구』, 정두희, 한국연구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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