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삼별초의 대몽항쟁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7.07.16 / 2019.12.24
  • 9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하고 싶은 말
고려시대 삼별초에 관해 세밀하고 자세하게 정리한 자료입니다.
레포트 점수 15점 만점에 15점 받은 자료입니다.
좋은 점수 받으실거라 확신 합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삼별초의 성립과 성격
2) 삼별초의 항쟁
(1) 초기의 항쟁
(2) 진도에서의 항쟁
(3) 제주에서의 항쟁

3. 결론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2) 삼별초의 항쟁

(1) 초기의 항쟁
13c의 고려는 최씨정권(崔氏政權)이 국내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는 정세였다. 최씨정권은 실권뿐만 아니라 강력한 사병을 조직한데 반비례하여 관군은 약화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있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였다.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 강동성(江東城)에 글단(契丹)이 침입해오자 몽고와 합세하여 물리쳤을 때이다. 이를 구실로 몽고는 과다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와중에 1225년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 일행이 압록 강변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몽고는 1231년부터 1259년 강화(講和) 때까지 전후 6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
1231년(고종18) 몽고 장수 살례탑(撒禮塔)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1차 침입해 오게 된다. 이에 고려는 몽고의 북방지역의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 파견과 공물 등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일단 강화하였다. 이후 무리한 조공의 요구에 몽고에 대한 장기적 항전을 선포하고 1232년(고종19) 강화도로 천도(遷都)를 단행하였다. 이는 몽고군이 대륙 유목민으로 육전(陸戰)에는 능하나 해전(海戰)에는 약한 것을 노린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몽고의 침입으로 천도까지 감행하였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고려는 결국 원에 강화조약을 맺고 만다. 그러나 삼별초만이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분연히 일어난다.
삼별초(三別抄)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사병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굳이 분류하자면 특수부대에 속하는 군대였다. 정규군도 아닌 삼별초가 왜 마지막까지 몽고와의 치열한 항쟁을 벌였던 것인가?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임금이었던 원종(元宗)이 몽고 정부에 입조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보통 강대국이 국왕을 직접 입조하라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태자들이 볼모 형식으로 입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원종이 직접 입조하였다는 것은 고려가 완전히 몽고의 예속 국이 됨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것을 뜻한다.
원종의 입조는 왕권 회복을 뜻함과 동시에 화친책이 정세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1270년 5월, 몽고에서 돌아온 원종은 고려군이 아닌 몽고군의 호위 아래 강화에 있던 군민들에게 위압적인 자세를 보이며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마치 원종은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윤용혁/ 일지사/ 2000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연구2/ 윤용혁/ 일지사/ 2000
- 무인시대와 삼별초/ 유현종/ 대산/ 2003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7
- 고려무인 이야기/ 이승환/ 푸른역사/ 2001
- 삼별초/ 김정한/ 시와사회사/ 1994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인문어학 국사 안의 이데올로기 교과서에서 살펴본 거짓 진실
  • 삼별초의 대몽항쟁교과서에서는 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고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실제정인지, 김종서 등이 조선 세종의 명을 받아 문종

  • 대몽항쟁과 삼별초의 난 대몽항쟁 삼별초 난 소개 대몽항쟁 삼별초 난 조사 대몽항
  • 대몽항쟁과 삼별초의 난서론고려는 정변으로 거듭 속앓이를 하면서, 조야는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만을 중시하는 그릇된 풍토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고려무신들은 권위와 체통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현실에 격분하여, 마침내 반란의 칼날을 뽑아 고려사회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무신들의 입김은 거세졌고, 문신들은 도리어 숨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때 무심코 자행했던 오만방자한 망동의 대가를 철저히

  • 무신정권과 대몽항쟁
  • 고려사회를 귀족사회로 규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ⅴ. 문학의 발달고려 전기의 문학은 삼국 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와 한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의 여맥이 이어져 균여의 《보현십원가》 11수가 전하고 있다. 현종 때 현화사의 낙성식에서 문신들에게 한시와 더불어 향가를 짓게 한 것도 그때까지 향가의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예종이 두 장수를 추모하여 지은 《도이징가》나 정서의 《

  • 몽고침입(대몽항쟁, 몽골항쟁)의 의의, 몽고침입(대몽항쟁, 몽골항쟁)의 과정, 몽고침입(대몽항쟁, 몽골항쟁)의 몽고군 전력, 몽고침입(대몽항쟁, 몽골항쟁)의 민란(民亂), 몽고침입(대몽항쟁, 몽골항쟁)의 강화
  • 기다리고 있었고 몽고의 지배는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참고문헌- 김동전,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제주도, 해양문화재단 :생각의나무, 2001- 윤용혁, 고려의 대몽항쟁, 단계적으로 발전해 간 항쟁역량, 내일을 여는 역사, 2003-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 연구, 고려대학교, 1988- 이원복, 무인 정권과 대몽 항쟁, 계몽사, 2005- 역사교육교재연구원, 대몽 항쟁과 원의 간섭, 한얼교육, 2008

  • [무신정권] 무신의 난과 무신정권
  •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개경 정부에 대항하여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를 거쳐 전후 4년간에 걸친 저항을 하였으나, 결국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실패하고 말았다.12, 13C에 걸친 무신정권은 대부분의 무신 집권자들이 신분이 낮았었기 때문에 그들의 집권은 신분 질서를 붕괴시켰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지배세력은 교체되었지만 집권 이념 등 지배할 능력은 부족했다. 무인으로써의 한계와 자신들 안에서의 권력쟁탈전으로 정치에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