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과 금오신화] 김시습과 금오신화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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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작가적 배경
Ⅱ. 김시습과 문학
Ⅲ. 김시습의 사상
Ⅳ. 금오신화의 사상적 배경
Ⅴ. 금오신화의 개별적 작품 개관
1)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2)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3)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4)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5)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본문내용
김시습(1435-1493)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혹은 동봉이라고 한다. 그는 재질이 특출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고,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조에 끝까지 벼슬에 오르지 않아 후대의 사류들에게 한결같이 찬사를 남겼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지나치게 그의 주변 사건에 치우치거나 그의 행동을 조선조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과 관련하여 이해하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1435년(세종17년)에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고려조에서 무신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나 점차 쇠락하여 선초에 이르러 무관말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는 병으로 벼슬마저 맏지 못한 아버지 일성과 장씨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이런 그에게 있어 유학자로 성공하여 가문의 창달을 도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온지 여덟달 만에 능히 글을 알아 이웃의 최치운이 시습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세 살 때에 벌써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 때에는 조정에까지 그의 영민한과 재주가 알려져 세종에게 불려가기도 하였다. 이후 세상에서는 그를 김오세라고 불렀으며 13세 때는 사서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13세 혹은 15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외숙모에게서 양육을 받게 되었는데, 다시 3년 후 외숙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홀아버인 아버지는 병이 있어 가사를 다스릴 수 없으므로 계모를 얻으니 좌절과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번거로운 집안을 떠나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단종 원년 계유의 감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이어서 단종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서 계유 2월에 특설한 경과인 증광시에 동료와 같이 응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결국 그는 하급무인의 집에서 태어나 입신양명하여 선대의 가문을 살리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공부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과 과거 실패, 그리고 패도의 등장 등으로 말미암아 깊은 좌절을 겪고 있다. 이것은 금오신화의 각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바라고 하겠다. 매월당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 독서하다가, 21세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잡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즉시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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