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의상학] 조선의 궁중 고유복식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7.04.09 / 2019.12.24
  • 2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2,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하고 싶은 말
조선시대의 궁중의복에 관한 자료입니다^^
상세히 설명되어있으니 많은 도움을 받으셨으면 하네요.

이걸로 에이쁠 받았습니다^^
목차
1) 왕
2) 왕비
3) 세자
4) 공주
본문내용
조선왕조(AD1392-1910)는 유교사상의 예(禮)를 기본으로 한 철학이념으로 통치되었으므로 유교윤리의 가정적, 사회적 기능 중 관혼상제를 예로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따라서 복식문화도 예를 표현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그 외에도 그 시대적인 미적 예술 감각의 표현 등에 부응하여 500년간 변천되어 왔다.
조선 전기는 고려복식을 계승하여 조선왕조 복식제도의 초석을 만든 시기로 명(明) 복식의 영향 하에서 점차적으로 조선의 관복제도가 확립되었다. 중기는 초기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영세불이의 대법전으로 삼아 경국대전에서 제정된 관복대로 습용한 시기인데, 이 시기는 궁중의 행사를 그린 의궤도(儀軌圖)와 사대부가의 모임을 기록한 계회도(契會圖)를 통하여 구체적인 복식 착장 형태를 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관복제도의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후기는 조선왕조의 중흥기로 민족적 특색을 나타내는 문화가 발달했으며 복식문화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영ㆍ정조대에는 문예부흥의 절정을 이루는 한편 실학이 융성하고 천주교가 전래되었으며, 특히 서민문화가 발달하여 김홍도, 신윤복과 같은 풍속화의 대가들이 당시 서민들의 생활상을 잘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인물들이 입고 있는 복식형태는 우리 민족만이 지닐 수 있는 멋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971)가 있었고, 일본의 강압적인 위협으로 병자수호조약(1876)을 맺어 외국의 문호가 개방되었는데, 한ㆍ양복의 혼용이 시작되었다. 광무9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일합방(1910)이 이루어져 조선왕조의 건국 이래 27왕 519년의 종말을 맞게 된다.

옷의 소재는 계절별로 달랐다. 먼저 봄과 가을에는 전통 문양의 사철사, 자미사, 국사 등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겨울에는 명주와 양단 등을 사용하여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으며, 여름에는 생 명주나 모시, 옥사, 노방 등을 사용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었으며 이렇게 계절별로 다른 옷을 입어서 4계절을 보냈었다.

<왕>
1. 곤룡포(袞龍袍)
곤룡포(袞龍袍)는 조선시대 국왕의 시무복(視務服)을 뜻한다. 곤룡포는 여름에는 사(紗), 겨울에는 단(緞)으로 만들어졌다. 왕은 대홍색(大紅色)에 남색 안을 넣은 곤룡포에 금사(金絲)로 수를 놓은 사조룡보(四爪龍補) 4개를 양어깨·앞가슴·뒷등에 각각 달고, 황제는 황색 곤룡포에 붉은색 안을 넣어 오조룡보를 같은 위치에 단다. 깃은 둥근 곡령(曲領)으로 하여 오른쪽 어깨에서 단추를 끼우며 양쪽의 무의 여분을 뒤쪽으로 반정도 접어서, 무의 윗부분을 꿰매어 고정시킨다.
곤룡포 착용 시에는 익선관(翼善冠)-조선시대 왕이 상복인 곤룡포를 착용할 때 익선관(翊善冠)을 썼다. 익선관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곤룡포와 마찬가지로 세종 26년(1444) 3월 명나라 황제가 사여한 데서 비롯되었다. 형태는 모체가 2단으로 턱이 지고 앞쪽보다 뒤쪽이 높으며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 2개가 윗 쪽을 향해 달려 있다. 이러한 날개형태 때문에 익선관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북한민속의 이해 정리노트
  • 조선 남자 관모의 몇 가지에 대하여(최원희)● 구분- 관모의 3가지 시기구분 -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복식의 구분머리장식(쓰는 것) : 논문에서 설명하는 것몸치장(입는 것) : 입는 형태가 2가지가 있음(원피스, 투피스)/ 원피스에서 투피스로변화발치장(신는 것) : 혜(짚신 같은 것, 일반적 신발), 화(발목위로 올라오는 신발, 장화)- 종류구분 - 절풍, 책, 금관, 갓● 절풍- 재료 - 천이나 가죽을 사용 ➜ 어떤 재료를 사용했느냐

  • 한국사 요약정리
  • 궁중 안의 인공호수(경주 안압지: 조선시대 명명), 정원 조경술 수준 높음 안압지 출토 주사위: 주도(酒道)에 대한 기록* 석굴암: 경덕왕(751): 김대성, 전생의 부모를 위해 창건(인조 석굴사원): 전실(구형: 사각형), 후실(원형): 무덤양식+사찰양식 겸하고 있음* 불국사: 경덕왕(751): 김대성, 현생의 부모를 위해 창건: 다보탑, 3층석탑(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범종: 성덕왕(725): 오대산 상원사 동종(현존 최고): 혜공왕(771):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 에밀

  • 조선시대 생활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 조선복식고》를 펴냈는데, 우리나라 고대 복식에 관한 선구적인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고부자,《역사와 현실》19, 1996.그는 고대 복식에 대한 많은 자료와 방법론을 구사하면서도 긴 시기를 적절하게 개괄함으로써 이후 연구의 지침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손진태와 이여성이 6.25전쟁 때 각각 납북되거나 월북한 후 역사학자로서 생활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이는 매우 드물었

  • [고전시가론] 고려속요
  • 조선시대에는 궁중음악으로 쓰이었다.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가사는 없고, 다만 “부인이 몸으로 사람을 섬기다가 한번 자기 몸가짐을 실수하면 사람들에게 천시와 미움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노래를 지어서 실의 빨강,초록,파랑,흰색을 가지고 되풀이 비유해서 취사의 결정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라 기록되어 있어 여인의 정조를 노래한 것으로 여겨짐. (정절을 잃지 않으려는 여자의 마음)급암 소악부에 다음과 같은 악부시가 있다.

  • [중국문화] 경제 문화적으로 접근한 중국과 우리의 관계 -중국진출 방안과 한류에 대한 고찰
  •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목든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로마의 위대한 문화의 배경에는 실용적인 토목공법이 나 의학 등의 현실적인 과학기술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2)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문화가 수용하는 기술이나 기술을 활용한 상품은 지리적, 사회적 특징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