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최초의 선교사 알렌과 네비우스, 남장로교 선교 및 북한 선교 분석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7.03.28 / 2019.12.24
  • 11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97)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5,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Ⅰ. 서론

Ⅱ. 최초의 선교사 알렌

Ⅲ. 네비우스 선교
1. 순회전도
2. 선교지 분담 정책
3. 성경공부와 신학교육 정책
4. 사회 계층에 차별적으로 대응한 선교 정책

Ⅳ. 초기 선교사의 지방 전도

Ⅴ. 남장로교 선교

Ⅵ. 북한 선교
1. 접촉을 통하여
2. 교단을 통하여
3. 방송을 통하여
4. 북한 선교를 위한 기독교적 자세

Ⅶ. 결론
본문내용
처음부터 한국 교회는 재정 자립을 이룩한 교회로 시작했다.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이루어졌으며 선교사와 사역자 뿐 아니라 초신자들도 열심히 전도했다. 1904˜7년에 일어난 대부흥은 성경공부와 기도 생활에서 얻게 된 선물이다. 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신자 수가 불어나기 시작해 1900년부터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장로교는 선교사들로부터 교회의 치리권을 넘겨받았다. 감리교는 남북 선교부 아래 있던 교회들이 1930년 하나의 감리교회로 출발하면서 한국인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1915년부터 감리교는 신학교육에 한국인 교수가 참여했고, 장로교는 30년대 초부터 참여했다.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다양했는데, 한국 교회는 주로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을 넘겨받아 전도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선교사들의 관심과 기여는 다양했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기여한 것을 충분히 계승하지 못해 유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일제 식민지로 말미암아 참여할 사회를 상실했고 늘 생존을 염려하는 처지였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설립을 위해 본국 선교부가 우려할 정도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식민지 시대를 지나 1950년 대 이후 교회는 분열되었고 보수적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1950˜60년까지 구제봉사활동은 계속 선교사들이 맡아 했으며, 신자들은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외국 교회의 선교부나 봉사기관의 원조를 받아 했다.
한국 교회의 부정적 현상들을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때문이라고 전가시키는 사고는 지양해야 한다. 교육과 사상이 그렇듯이 신앙은 짜여진 틀에 똑같이 찍혀 나오는 공산품이 아니다. 백 년이면 몇 세대가 살고 가는 긴 세월이다. 그 세월에서 얼마든지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들포도를 맺었다는 이사야의 탄식이나 가라지 비유가 그것을 말해준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부정적 모습의 원인은 선교사들 때문이라기 보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역사적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 역사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한국전쟁, 독재정치가 시작된 흔적은 있는데 그 끝은 말끔하지 않다. 그것은 교회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어 교회가 역사를 주도하기보다는 종교의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따라서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은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기보다는 주로 역사의 과정에 있었던 복합적인 사건들과 한국 교회와 지체된 우리 각자에게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800년대 후반 그리고 1900년대 초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후진국에 와서 복음과 서양문화를 전수하며 다양하게 사역했다. 오늘날 한국 선교사가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머티어가 주장한 ?옛?방법보다는 네비우스의 ?새?방법이 훨씬 배울점이 많다. 따라서 네비우스의 방법을 충분히 참고하고 현지 사정을 고려해 융통성 있게 활용하길 바란다. 선교지 상황은 항상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에서 일한 외국 선교사들이 네비우스의 방법을 따른 것 가운데 가장 배울 점은 성경강조와 더불어 ?선교지 분담 정책?이다. 선교사들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복음을 전한 모습은 참으로 배울 점이다. 한국 교회는 수없이 분열돼 일치와 연합을 지향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시점에서 파송받은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하나의 협의체를 구성해 협력하며 선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1945년 이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외국 선교사 수는 1,529명에 달한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교파별 구분과 교회사 서술간의 상관성 문제
  • 최초의 침례교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침례는 1899년에 처음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선교사였던 스테드맨은 안수를 받은 이가 아니었다. 스테드맨은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Bull William)을 초청하여 금강에서 최초로 침례식을 거행하였다. 『韓國浸禮敎會史』, 49. 작은 사건이지만, 이러한 경우를 ‘선교 에큐메니즘’의 일환으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 3장 교파사 서술교파사는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례보고서 형식의 미북장

  • [기독교사회복지론] 대한예수교장로회
  • 및 조직, 기능(1)총회 사회부의 설립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 총회는 1961년 총회 제 45회기 중에 농촌부, 은급부, 구제부를 병합하여 총회 안에 사회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고 총회 창립 50주년인 제 47차 총회 회의록에 최초로 사회부 활동보고가 수록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 서막을 열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규칙 제3장 제11조에는 사회부의 임무를 구제, 농촌 은급 기타 사회사업에 관한 일을 담당한다고 되어 있다.총회 사회부는 1978년 총회 상

  • 한국의 기독교사 연구
  •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은 실로 선교의 사명을 띠우고 먼 길을 왔다가 보고한, 선교사가 교황청에 보낸, 서간문을 통해서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중국에 와서 신통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지만, 한국의 이름을 간접적으로나마 세계에 알린 조산부의 소임을 다했던 것 이다. 3. 일본을 통해서 접촉된 기독교1517년 독일 비텐베르그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을 때,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랜 세력의 중심 지역들이 프로테스탄트

  • [한국교회사] 선교사와 한국교회
  • 선교사가 이 땅위에 잘못된 신앙을 전한 것일까? 왜 교단도 다양하여 서로 갈등만 일으키는 것일까? 이 교단들은 어떻게 전래되었나? 등 다양한 이야기를 선교사가 이 땅위에 들어온 역사를 통해 이야기를 하겠다.2. 본 론ⅰ) 당시의 정치상황과 선교사의 활동이 땅에 가장 첫 번째로 발을 들인 개신교 선교사는 문서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유대계 폴란드인 귀츨라프였다. 그는 1832년 충남 고대도 등 서해안 연안에서 통상 청원 및 선교활동을 하였다.

  • 인문과학 개신교의 도입과정과 성장의 동력
  •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초기 개신교의 한국수용에 많은 부분 기여한국선교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알렌(1884년, 의료선교사, 미국 북장로회 소속)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주된 선교 사업으로는 의료분야에서 선교.초기 개신교의 선교의 대부분은 교육과 의료 선교로 본질적인 복음 전파가 아닌 간접적인 선교를 하게 되었다.개신교 집단의 내적 갈등진보적 지식인들의 생각: 초기 개신교 공동체와 근대화가 민족 독립의 확보를 위해 사회 및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