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목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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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임진왜란, 그 혼란기의 광해군과 인목대비

2. 광해군과 인목대비
(1) 광해군 1575(선조8)~1641(인조19)
(2) 인목대비 1584(선조 17)~1632(인조 10)
(3) 주변 인물들 - 유영경, 정인홍, 이이첨

3. 광해군의 즉위와 계축옥사의 시작

4. 계축옥사와 김제남의 죽음, 영창대군의 폐서인

5. 영창대군의 죽음

6.인목대비의 폐모논의

7.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폐위

8.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1. 임진왜란, 그 혼란기의 광해군과 인목대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은 14대 임금인 선조였다. 선조의 즉위는 16세기 초반 이래 지속되어온 훈구와 외척들의 척신 정치가 끝나고, 척신정치 시절 박해를 받았던 사림파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면서 바야흐로 정치판이 물갈이를 하던 시대에 이루어졌다. 아직 남아있던 척신들에 대한 처리방향을 놓고 사림들끼리 분열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것이 동인과 서인의 분립이었다. 이어서 동인이었던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런 오랜 훈구와 사림들 간의 대립, 그리고 이어지는 사림들 간의 붕당은 조정을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국가 외적으로는 주변 국가들의 대한 정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못했고, 국가 내적으로도 정치, 군사, 경제적인 모든 분야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말 그대로 ‘준비된 군대’였던 일본군이 침략해왔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일본군은 오랫동안 조선 내정을 주시하면서 조선을 연구했다. 거기에 더하여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에 드나들었던 대마도 출신 상인들이 그들의 길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에 전쟁 초반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해 나갔다. 조선은 일본군을 막을 힘이 없었으며, 조정은 뾰족한 대책 없이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하기로 정한다. 왕이 도성을 버리는 것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민심을 흩트려 놓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상황에서 조정은 그 대안으로 왕세자를 책봉하기로 한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갑작스레 왕세자로 책봉된 것이 선조의 두 번째 아들인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이때 나이가 열여덟 살 이었으며, 그는 성대한 왕세자 책봉 의식 대신 피난 보따리를 꾸려야 했다.
선조는 북쪽으로 피난하면서 광해군에게 인사권과 상벌권을 넘기면서, 조정을 둘로 나누고 분조(分朝)를 그에게 맡긴다. 이것은 전황이 좀처럼 나이지지 않고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커다란 위기감을 느낀 선조가 광해군에게 자신의 권력을 일부 떼어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전쟁을 수행하고 민심을 수습케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선조 자신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들어가 명에게 의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은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충성을 바칠 대상이자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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