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대화는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다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나 할까... 솔직히 나는, ‘연극의 이해’수업을 듣는 학생으로서, 그들의 대화나 행동에서 일부러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가령, 디디가 모자를 벗어서 후후 불거나 그 안을 들여다 보는 행위, 고고가 힘들게 벗어던진 신발 한 짝 등 이것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려고 애썼지만 극이 끝나고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솔직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며’ 이 연극에서 그런 의미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건 아닐까?
내게 흥미로운 인물은 럭키였다. 포조가 시키는 것 외에는 하지 않는 럭키. 생각하라는 명령에 그가 내뱉는 말은 끝없는 단어에 불과하다. 그 말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막아낼 수 없을 정도의 넘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려야지.’ 이것이 가장 많이 나왔던 대사이고, 이 연극의 핵심이다. 고도. 그리고 기다림. 이 두 가지만 해석할 수 있다면 연극을 모두 이해 한 것이다. 강력범만을 수용한 미국의 San Quentin 교도소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상연되었다. 교도소측은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도를 선택했고, 무지한 수감자들이 어려운 연극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두 광대와 함께 울고 웃으며 호흡을 같이 하였
떨어지는 고통도 또한 부조리한 것이라는 위로를 준다.그리고 누군가는 말했다. ‘부조리를 겪고 부조리를 말하지 않는 것은 배반이다.’ 라고 말이다. 인간 세상이 모두 이치에 맞을 순 없다. 왜 성실하게 살던 내게 이런 일이!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한 부조리를 다양한 극작가들은 풀어내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나 또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두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로워지는 연극일 것 같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정보는 거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부조리극에 대해서도 몰랐고 첫 주 수업시간에 보여 주셨다던 비디오의 존재했었음에 대한 기억만 있었고 동행한 분들 중 두 번째 고도를 보러 간다는 연극 관람 동료의 짧은 한줄 감상평 만이 한 귀로 들어와서 한 귀로 나갔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는 연극이나 영화 어떠한 작품도 미리 줄거리를 알려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스포일러 경고에 대해서는 철저하다. 위의 한줄 감상
고도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식물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고도는 단순히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기다림을 반복한다. 혹 그 행복이 막연한 것이라도 말이다.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난 후 현재의 삶에 많은 일깨움을 얻은 듯하다. 어리석고 헛된 기다림일지라도 그것을 기다리는 그 자체가 “내가
고도는 역시 오늘 오지 못한다. 내일 온다. 소년이 떠나자 남은 둘의 침묵과 대화가 이어진다. 나무에 목이나 맬까 고민하자 끈이 없어 내일은 가지고 오자고 얘기한다. 그리고 둘은 다시 가자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 이 소설을 알게 된 것은 이경미 감독의 영화 미스 홍당무를 보고 나서이다. 극 중 여주인공 두 명이 연극을 준비하는데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둘이 연극을 준비하고 대사를 외우는 것을 보고 많이 웃었다. 영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