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보도연맹 -금정굴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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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인민군에 의해 부산까지 밀렸던 국군은 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이때 고양시 일대도 함께 수복되었는데, 남쪽이 고양시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1개월여에 걸친 부역자 색출과 처단이었다. 그러나 경찰의 주도하에 진행된 치안대 및 우익단체의 부역자 색출작업은 최소 수백명의 무고한 양민들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학살 가해자들은 일제시대 폐금광으로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버려져 있던 금정굴에서 이른바 부역자 처벌을 자행하였다. 적극적인 좌익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미 인민군을 따라 월북한 후였고, 가해자들에 의해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의 대다수는 월북한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 인민군 점령시 기껏 곡식의 낟알을 세는 정도의 일을 한 소극적인 부역자, 개인 감정으로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린 양민들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반세기가 훌쩍 넘었다. 집과 일터, 길에서 아무렇게나 끌려가 무자비하게 희생당한 피학살 유가족들은 친인척들의 주검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기나긴 세월을 '빨갱이 가족'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천추의 한을 품고 살아왔다. 사건이 있은 지 50년, '금정굴'은 어느 누구도 갈 수 없는 곳, 결코 그날의 참상을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공대위 사이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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