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중세의 위기 - 교회의 쇠퇴,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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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교회의 대분열
3. 흑사병
4. 위클리프와 후스
5. 대분열의 종식
6. 마치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중세에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이 계속 이어진 가운데 14세기에 필립 4세가 교황을 자신의 세력권 밑에 둠으로써 교회는 아비뇽과 로마에 각각의 교황이 들어섬으로써 대분열을 하게 이르른다. 또 이 와중에 흑사병이라는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페스트가 퍼지면서 중세는 그야말로 위기에 직면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그 중세의 위기, 교회의 분열과 또 이런 시대에 교회의 개혁 운동을 일으켰던 위클리프와 후스에 대해서 알아보고 유럽의 봉건사회를 급격하게 붕괴의 길로 이끌었던 흑사병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2. 교회의 대분열

교황 클레멘트 5세 (Clemens Ⅴ, 1305~1314)가 1309년 로마시를 떠나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교황청은 프랑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 발제 문에서는 1309년의 이 사건을 바빌론 유수라고 표기함.
이후 클레멘트의 사후에 요한 22세 (Joannes ⅩⅫ, 1316~1334) 때에는 친 프랑스 정책을 폄으로써 친 프랑스 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들로부터 큰 반발을 사게 된다. 이후 교황들은 재위를 할 때마다 로마시민들에게 곧 귀환하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요한 22세 이후의 베네딕트 12세 (Benedict Ⅻ, 1334~1342) 는 로마인들에게 곧 귀환하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아비뇽에 웅대한 궁전의 건축을 명령하고 교황의 문서 국을 아비뇽으로 이전함으로써 자기의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음을 보여줬었다. 또 베네딕트 12세 이후의 교황인 인노센트 6세 (Innocent Ⅵ, 1352~1362)나 우르반 5세 (Urban Ⅴ, 1362~1370)는 로마로 귀환하기 위해 준비를 하였으니 실행하기 전에 사망하거나 로마로 돌아갔었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것은 로마 시민들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단발성의 공약에 불과했고 결국은 1376년까지 67년간 바빌론 유수는 이어지게 된다. 1377년 그레고리우스 11세 (Gregorious Ⅺ, 1370~1378)는 교황청을 다시 아비뇽에서 로마 시로 옮김으로써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귀환한데에는 그가 교황으로 선출 되었을 당시 시에나의 케더린 (Catherine of Siena)가 나타나 교황의 로마귀환을 촉구하여서 영향을 준것이라고 중세교회사 책에서는 다루고 있다. 당시 케더린은 그녀는 신비주의의 스승으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그레고리가 교황으로 선출되던 해에는 신비체험을 해 자기가 환상을 보았다고 선포하고 곧 교황청을 로마로 귀환시키는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바빌론 유수는 종결되었지만 그레고리우스는 다음 해에 로마에서 죽었고, 곧 로마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참고문헌
민석홍,『西洋史槪論』, 삼영사, 1997.
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 이연규 역, 『西洋 中世史』, 집문당, 1986.
유스토 L 곤잘레스, 서영일 역, 『중세교회사』, 은성, 1995.
서양 중세사 학회, 『서양 중세사 강의』, 느티나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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