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사림파 정권과 임진왜란 -위기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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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임진왜란 전 조선의 상황
1) 텅빈 군대
2) 붕당의 시작
3) 정여립의 난
4) 일본과의 미묘한 관계
2. 임진왜란의 경과
1) 초․중․후기 전쟁 상황
2) 전쟁 영웅
3) 의병 신화의 진실
3. 임진왜란 후 조선의 상황
1) 임진왜란의 피해양상
2) 북인정권 집권과정
3) 임진왜란 이후 논공행상
4. 임진왜란의 영향과 의의
1) 임진왜란의 영향 (변화된 동아시아 정세)
2) 임진왜란의 의의

본문내용
조선 전기에는 현직 관료와 학생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이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 개병 제도(良人皆兵制度)가 유지되었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농민들을 윤번제로 징집, 현역에 복무하게 하였다. 현역을 상번(上番), 대기자를 하번(下番)이라 하며, 하번에는 군포(軍布)를 내게 해서 군비로 썼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에 와서는 사족 계층의 부패 속에서 이러한 군사제도는 무너져 갔다. 사족 계층은 군역을 최대한 피하려 하였으며, 일선 지휘관들은 상번으로 부터도 군포를 받아 착복하고 멋대로 현역을 면제해 주었다.(放軍收布) 조정은 이러한 폐해를 시정하려 하였으나 상황을 오히려 더 악화시켰다. 병역 의무자로 하여금 현역 복무 대신 아예 포를 바치게 하고, 조정이 이를 거두어 병력이 필요한 병영에 보내면 그곳에서 필요한 병력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제도로 바꿨던 것이다. 그럴싸한 제도였으나, 대부분 포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고 그럴 수 없는 농민들은 피역(避役)이라 하여 도망은 다니는 상황, 군포도 다른 비용으로 돌리거나 중간에서 횡령, 착복 등으로 병영에 군인은 갈수록 모자라 갔으며 그나마 있는 병력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인들이나 소년들이었다.
조선의 지방 군사제도는 지역 방어, 진지방어 개념으로 요새에 상주병력(常駐兵力)을 배치해 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도록 하는 진관제(鎭管制)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진관제는 군정(軍政)의 해이로 상주병력이 유명무실해 졌을 뿐 아니라,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하더라고 소규모로 분산되어 대규모의 적군에 대항하기 어려운 점 때문에, 이시기 제승방략(制勝方略)의 개념을 도입했다. 제승방략은 전시에 군사를 분산시키지 않고 정해진 한곳에 모여, 조정에서 내려온 장수의 지휘를 받아 대규모 적군과 정면 대결하는 병력 운용 개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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