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대외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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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 리 말

일. 건국기의 동아정세와 대외관계
1. 동북아의 국제정세
2. 건국과정
3. 건국기의 대외관계

이. 세력팽창과 국제관계의 변화
1. 영토 확장과 흑수말갈
2. 신라의 동북변방비와 대립
3. 일본과의 국교 수립 -신라의 대당외교에 대한 발해의 대응-
4. 등주공격과 대당외교

삼. 발해성장기의 대외관계
1. 대당외교
2. 신라와의 경제적 교섭
3. 일본과의 경제외교

사. 해동성국의 대외관계
1.대당외교와 영토 확장
2. 발해와 신라의 외교적 경쟁과 대립

오. 멸망기의 대외관계

맺 음 말
본문내용
3. 건국기의 대외관계

발해는 7세기 후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까닭에 건국 초기부터 돌궐, 신라는 물론 적대국인 당과도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전개하여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대내체제의 안정을 기하였다.

가. 돌궐과의 외교적 교섭

발해는 건국직후 막북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때 돌궐은 묵철가한(693`716)의 치세로 당이 무후와 위후의 실정으로 내부의 통치체제가 문란해 진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여 당을 압도할 정도였다. 당이 천문령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발해 정벌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돌궐의 등장때문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당군과의 치열한 항쟁과정에서 국가를 세운 발해는 국가적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 당과 대립하는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대당 견제외교는 유연, 돌궐 등 북방 유목민족과 제휴함으로써 중원 왕조를 견제하고자 하였던 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을 계승한 것이며 이후 발해의 대 북방외교의 기본 틀이 되었다.

나. 신라와의 외교적 교섭

일반적으로 종래의 연구에서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적대적이거나 소원한 관계로 파악되어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보다 능동적인 입장에서 그 관계가 검토되고 있다.
이시기 신라와 당의 관계는 아직 소원하였으며 신라는 대일외교를 보다 중시하였다. 그 까닭은 구백제령 문제에 연유한다. 당이 신라의 구백제령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던 까닭에 신라는 문무왕 8년(668년)이후 사실상 당과의 정식 국교를 단절하고 대당전쟁기에 들어가는 데, 국교가 재개된 신문왕대에도 대당 강경책을 고수하였다. 신문왕 12년(692년)의 태종 무렬왕의 묘호를 고치라는 당의 요구를 거절한 신라의 태도에서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를 알 수 있다.
당과의 직접적인 충돌과정에서 등장한 발해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신라와의 외교관계를 추진하여 건국 직후인 700년경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다. 이러한 사정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에 보이는 데, 이 기록에 의하면 발해는 건국 직후에 대조영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었고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 5품인 대아찬의 질을 주었다고 한다.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이것을 효소왕 9년(700년)의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재5품관을 주었다는 표현은 물론 신라의 발해에 대한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이지만, 당시의 국제적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발해는 건국직후 국가의 터전을 마련하던 시기이고, 신라는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여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 발해의 국력은 신라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발해의 건국을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까닭에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동쪽으로 도망해와 나라를 세웠던 대조영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지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다. 대당외교

발해는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잘 활용하여 돌궐, 신라등 주변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외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고, 이것을 기반으로 말갈제부를 복속시키는 등 급속한 세력확장에 성공하게 된다.
발해의 건국 자체가 반당적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당은 발해 건국 7년만인 705년 중종이 즉위하자마자 장행급을 보내어 발해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였다. 당측에서 본다면 측천무후의 실정으로 발발한 거란의 이반, 발해의 건국, 돌궐의 성세에 대해 발해를 회유하여 대립하고 있던 돌궐 및 그 예하에 있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당의 외교적 회유에 발해는 비록 당과의 대립 속에서 건국하였지만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계속 당과 대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당의 선진문물은 발해의 발전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돌궐은 정치, 군사적으로는 강대한 국가였으나 유목국가라고 하는 문화적 성격상 발해의 발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과 발해는 여기에서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발해는 왕자 대문예를 보내어 숙위케 하였고 당은 발해를 정식으로 인정하려고 하였다. 물론 당시의 당으로부터 발해가 받은 '계루군왕'의 책봉호를 두고 중국학계에서는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중국적 자존의식의 표현일 뿐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변화는 돌궐의 반대로 더 이상의 외교적 진전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발해 역시 건국 직후 돌궐과 통교하여 대외적 안정을 구하였으므로,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당의 예종이 즉위한뒤 돌궐의 묵철가한이 당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니, 당은 공주를 강가함으로써 돌궐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당과 발해의 교섭은 이전과 같이 돌궐의 저지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발해는 713년에 정식으로 당과 국교를 수립하고 당과 교역을 시작하였으며, 716년이후에는 매년 당에 조공사행을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흡수하는 동시에 외교적으로도 국제적 승인을 통하여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강온 양면의 외교정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발해는 이미 고왕 대조영대에 이미 '내건국자호진국왕...진득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제국'({신당서}[발해전])한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세력 팽창을 이루어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참 고 문 헌>

사 요

*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
*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 {요사}, {자치통감}, {책부원귀}, {송막기문}, {도리기}, {당회요}
* {유취국사},{속일본기}

논 저

* 이용범, {중세 동북아세아사}, 아세아문화사, 1976.
* 왕승례 저, 송기호 역. {발해의 역사}, 한림대학 아시아문화연구소, 1987.
* 최무장 역, {발해의 기원과 문화}, 예문출판사, 1988.
* 김정배 외, {발해국사}, 정음사, 1988.
* 방학봉, {발해사연구}, 정음사, 1989.
* 서병국, {발해, 발해인}, 일념, 1990.
* 박시형 저, 송기호 역, {발해사}, 이론과 실천, 1991.
* 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1994
* 송기호, {발해정치사연구},일조각,1995
* 노태돈 외,{한국사10-발해},국사편찬위원회,1996
* 임상선 편역 {발해사의 이해},신서원,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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