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보이는 왜(倭) 관계 기사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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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金 泰 植 (弘益大)

Ⅰ.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으로서, 18세가 되던 391년에 왕위에 올라 412년까지 22년간 재위하였다. 그는 왕의 신분으로서 많은 전쟁에 참여하여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그 이후 고구려는 중국의 漢族이나 북방의 塞外民族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국이 되었다. 그가 죽은 지 2년 후(414), 아들인 장수왕이 고구려 도성(지금 中國 吉林省 集安縣) 근교의 능묘에 왕을 안장하고, 그 앞에 6.39미터 높이의 거대한 응회암으로 능비를 세웠다.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를 하고,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광개토왕릉비는 차츰 그 존재가 잊혀져갔고, 표면에는 온통 이끼와 덩쿨이 덮였다. 그 후 고구려 유민의 渤海, 거란족의 遼, 여진족의 金, 몽고족의 元, 중국 한족의 明, 그리고 만주족의 淸이 이 지역을 다스렸지만, 능비에 관심을 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조선의 문인들은 이것을 여진족 金 황제의 碑로 생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청나라는 백두산으로부터 이 지방 일대를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사람들의 거주와 통행을 금지하였다.

1876년에 청나라가 이 지방에 懷仁縣을 설치한 이후, 1880년 무렵에 능비가 세상 사람들에게 재발견되었다. 1882년에는 전면의 이끼를 제거하고 첫 탁본이 만들어졌으나, 이는 정식 탁본이 아니라 비면의 상태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雙鉤加墨本이었던 듯하다. 이를 통하여 1880년대 중반에 北京의 금석학자들이 능비의 존재를 알게 되자, 이들은 良質의 탁본을 제작 구입하기 위하여, 전문적 拓工인 李雲從을 集安에 파견하였다. 그는 1887년 및 1889년의 두 차레에 걸쳐 현지에 가서, 약 50여벌에 달하는 좋은 능비 탁본을 만들어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를 수집하는데 만족했을뿐,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일본의 참모본부는 1880년에 간첩 사코(酒勾景信) 중위를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의 지형 및 자료 조사를 시켰는데, 그는 1883년에 집안 일대에서 133매의 종이로 이루어진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손에 넣었다. 그가 이것을 직접 탁본하였는지 중국인에게 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해에 그는 일본에 귀국하여, 수집한 여러 자료와 함께 이를 참모본부에 제출하였다. 그가 가지고 온 탁본은 현재 동경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정식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묵본에 가깝다. 일본 참모본부에서는 이 비문을 육군교관 橫井忠直을 비롯한 몇 명의 학자들에게 위촉하여 비밀리에 해독 작업을 시켰으며, 이들은 5년간의 연구 끝에 1888년에 최종 판독문을 확정하였고, 이를 1889년에 <<會餘錄>> 제5집에 발표하였다.

그를 전후하여 일본 내에서는 비문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이 비문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둔 이유는, 거기에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倭寇를 여러 차례에 걸쳐 격파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일본학자들은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고구려와 충돌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日本書紀>> 등 고대 문헌에 전하는 神功皇后의 三韓征伐 전설이 거론되었다. 그 당시 연구자의 하나인 나카(那珂通世)는, 神功紀 49년(249)조에 나오는 왜군의 加羅 등 7국 평정 기사는..........(중략)
참고문헌
http://www.personweb.com/they%20said/textbook/text1.htm
http://www.2002culture.or.kr/kor/html/magazine12_22.asp
http://www.history.co.kr/Academy/korea/imna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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