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한일관계] 강화도조약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기의 일본의 대조선정책 및 청일, 러일전쟁의 조선과 관련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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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879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0년대
임오군란 갑신정변기의 일본의 대 조선정책의 특징
1) 서양세력의 견제를 위한 아시아 연대론
2) 청의 견제와 조선에 대한 정책

2.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 러일전쟁의 의미를
조선과 관련시켜서 약술
1) 청․일 전쟁과 조선
2) 러․일 전쟁과 조선의 병합

※ 참고문헌

본문내용
청과 일의 서양에 대한 협력은 일본의 경우는 서구열강 중에서도 특히 제정러시아에 대한 위협에 대응한 것이었고, 청의 경우는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것이었으나 1860년 청․러의 북경조약체결 이후에는 제정러시아가 주된 경계의 대상으로 대두되었다.
일본의 제정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은 1861년 3월 13일 러시아가 부동항의 확보 수단으로 대마도의 저기포를 점령한 사건이 터지면서 본격화되었다. 제정러시아는 청과 북경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연해주의 방대한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를 발판으로 동북아에서의 부동항을 얻어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노리게 되었다. 이런 중에 주일 러시아공사 고쉬케비취는 영국함대가 이미 대마도 답사를 완료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막부정부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러시아의 무력적 원조를 일본에 제의하였다. 일본이 이를 거절하자 러시아는 영국의 대마도 선점을 막고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비릴레프 함장 휘하의 포사드니크 호를 출동시켜 저기포를 점령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정보는 고쉬케비취 영사에게 강력한 항의를 하고 영국정부에 중재를 요청하였다. 주일 영국총영사 엘콕크경은 8월 27일 2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가서 공식 항의를 하였다. 러시아는 9월에 저기포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러시아의 대마도 점령사건은 일본의 아시아 연대론의 주된 공격 대상으로 러시아를 지목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고, 또 조선의 군비에 대해서도 잦은 충고를 하였다. 수신사 김기수의 기록을 보면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는 두 번에 걸쳐 제정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말하였다. 첫 번째는 김 수신사의 관저로 찾아 와서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할 것 같다고 하였다. 러시아가 병기를 장만하고 흑룡강에 많은 양곡을 저장하고 있는 사실은 일본인들의 매년 목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은 병기에 힘쓰고 군대를 조련하여 방어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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