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광해군에서 광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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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 광해군을 택한 이유
본론 : 1광해군과 임진왜란
⑴왜란 중의 활동
⑵전후 복구 사업
㈎대동법 실시
㈏사서편찬
㈐궁궐재건
2광해군의 정치
⑴일본과 조약
⑵중립외교
⑶연립정국
3광해군과 인조반정
⑴인조반정의 전말
⑵인조반정의 부당성
⑶광해군에 대한 왜곡
결론 :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시각

본문내용
2광해군의 정치
⑴일본과의 조약
광해군은 1619년 일본과 일본송사약조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고 1617년 오윤겸등을 화답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광해군이 나라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우리나라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겨준 왜와 이렇게 빨리 다시 외교를 하게되었던 것일까? 분명 왜는 철천지원수이자 다시는 상대도 하고 싶지 않을 나라였을 텐데 말이다. 그것은 광해군의 뛰어난 시대흐름을 읽는 능력을 볼 수 있다. 왜(倭)는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막부 체제를 확립해 대륙정벌의 야심을 버리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륙정벌의 타켓은 분명 조선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전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또 다시 왜와 전란을 치룬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광해군은 일본과 외교를 맺어 다시금 왜와의 전란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조약을 맺어 일본의 장사꾼들이 예전처럼 한양까지 오지 못하고 부산으로만 한정시키기까지 하였다.

⑵중립외교
광해군의 치적 중에서 가장 큰 치적으로 기록되는 것이 바로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이다. 명과 후금 사이를 적절하게 이용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지금에서 봐도 탁월한 외교술이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만주에 거주하면서 12~13세기 무렵에는 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한때 그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원에 망하고 명에 복속되면서 명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진족의 족장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토벌하였다. 1613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만주땅을 그 세력권 안에 두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명이 잠시 내분에 쌓여 있는 틈을 타서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더니 1616결국에는 후금을 세우게 되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명에게 ‘칠한대서’―명이 까닭 없이 자기네 조부를 죽이고 대대로 못살게 굴며서 통일사업을 방해했다는 등의 일곱가지 원한사를 말한다―이렇게 명에 대한 선전포고를 단행한 후금은 단숨에 명의 변방을 위협하였고 이에 명은 조선에게 10만 병력을 지원해준 것을 들먹이며 원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출병할 것을 표명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러 저러한 핑계를 대며 원군을 출병을 늦췄다. 그렇게 차일피일 원군 요청을 미루던 광해군은 조선을 먼저 치겠다는 명의 협박에 못 이겨 결국 1만군의 원군하게 된다. 그러나 강홍립을 필두로 한 조선의 군대는 누르하치 군에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 하고 참패하게 되고 재빨리 투항해 버렸다. 이것에는 광해군의 교묘한 외교술이 있었다. 점차 팽창하고 있던 후금군에게 대항을 할 수도 그렇다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군의 지원 요청을 모른척 하기도 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몰래 밀지를 내려 우리의 부득이한 입장을 강조하면서 은밀히 교섭,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광해군이 강홍립을 고집한 이유도 있다. 강홍립은 문관 출신이다. 그의 관직은 지금으로 말하면 외교관이었다. 후금과의 중요한 전투에 전통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의 강홍립을 그것도 외교관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강홍립을 그 전쟁에 필두로 삼은 것을 보면 광해군이 얼마나 주도 면밀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강홍립은 중국어에 능통한데다가 외교술까지 있으니 누르하치에게 광해군의 뜻을 잘 전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홍립은 볼모로 잡혀있으면서 강홍립을 통해 후금의 정세를 살피는 스파이 아닌 스파이 노릇까지 하였다. 이런 광해군의 예상이 맞아 들어 얼마 후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의 출병이 부득이 함을 이해해 주었고 광해군도 후금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좋은 표현을 하며 회신도 보냈다. 심지어 후금에게 막대한 물자까지 제공하였다. 이런 광해군의 행동들이 명에게 조금씩 친후금 정책을 눈치채게 하였고 광해군은 명나라의 거짓투항에 대한 의심과 친후금 정책의 의심을 덜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을 계속 보내는 한 편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란 장군을 지나치게 치하하고 사당을 세움으로써 명나라의 의심을 일축했다. 정말 지금의 정치 분석관도 생각지 못할 뛰어난 외교술이었다. 게다가 명과 대신들의 의심을 받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내린 결단력 또한 대단하다.

⑶연립정국
어느 시대를 막록하고 당파 싸움은 늘 있어왔다. 자신들의 익속을 챙기기 위해 서로 파를 갈라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쟁이 제일 심했던 것이 선조 때이다. 선조때에는 연산군, 중종, 명종에 이르기까지 핍박을 받아 오던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던 시기이다. 특히 자신의 확고한 주관을 갖고 있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선조의 행동이 더욱 더 당쟁을 부추기게 되었다. 사림들은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조선의 정사를 그릇된 길로 몰고 갔다. 임진왜란에 조선이 크게 당한 이유도 통신사로 갔던 두 인물이 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본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서로 다른 주장을 폈고 선조는 잘못된 주장을 편 당의 말을 믿고 안일한 대처를 했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의 우리군의 피해가 컸다. 이렇듯 선조때의 당쟁 싸움은 조선을 망하게 하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나라와 백성들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당의 권력독점을 위해서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당쟁이 훗날 모든 당쟁의 원인 제공자이자 오늘날까지 그 더러운 과거를 이어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한나랑당, 민주당, 열린우리당등 당들은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당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과거의 당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여튼 우유부단한 선조에 의해 조선 정사는 당쟁에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특정 정당의 권력 독점으로 이루어졌다. 광해군은 이런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 대윤과 자신을 지지하지 않던 세력 소윤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으며 서얼, 양인 등을 가리지 않고 실력으로 실력으로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일이 없어 당쟁을 사라지게 하려 하였다. 궁극적으로 당쟁을 없애지도 광해군 자신도 말년에는 대윤의 정책에 무조건 따르며 일당전제화를 이루면서 연립정국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런 당쟁의 폐해를 일찍히 파악하고 그것을 시정하려고 했던 점에서 무능하게 당하기만 했던 선조와 비교가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지두환 <선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0
<광해군 일기> 여강출판사 1993
<인조실록> 여강출판사 1993
이선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1998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이이화 <국가 재건과 청의 침입> 한길사 2000
신명호 <조선의 왕> 가람기획

[참고 영상자료]
KBS역사 스폐셜 중(中) “광해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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