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임진왜란 중 조선의 군사체계와 신립장군의 군사 전략 및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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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

1. 번상병(番上兵)제도를 바탕으로 한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

II. 탄금대 전투의 전개

1. 각 군의 장수 및 편제
2. 전장 환경
3. 각 부대의 이동 및 전술
4. 전투의 전개
5. 탄금대 전투의 결과

III. 신립장군부대의 패배 원인

1. 전략의 문제점
2. 전술의 문제점
3. 적에 대한 과소평가

본문내용
1. <번상병(番上兵)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들이 교대로 근무지까지 이동하여 군복무를 하는 것. 60세가 되어 면제될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생산에 종사하던 인력을 그대로 전투원으로 고용하는 민병에 가까운 수준이며, 이는 당연히 복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는 직업군인제에 비교할 바가 못 됐고,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는 징병제(徵兵制)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도를 바탕으로 한 제승방략(制勝方略) 유사시에 각 도의 감사들과 고을의 현감들이 각기 병력을 거느리고 집결하여 대군을 형성하는 것, 이들은 집결지로 이동하는 도중에 정남들을 징집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대군이 형성된 다음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와 그 분관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음.
체제>
1) 번상병(番上兵) 제도의 실패
- 조선의 군제는 번상병 제도가 근간이었다. 조선과 같은 농업국가에서 농병일치제도를 택한다는 것은 군대의 양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농업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숫자가 생산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인력을 군사로 차출하게 되면,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지고, 미곡 조세를 통한 국가예산 창출도 곤란을 겪기 마련이었다.
또한 병사들의 훈련부족이 심각하였다.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세미(稅米)를 경작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무예를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조선의 장정, 정남(丁男)들은 병역뿐만 아니라 공공사업에도 차출되어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들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소집되어 최소한의 훈련을 마치는 식으로 복구해야 했으며, 농번기에는 마저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또한 군공에 따라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고, 계급과 월급을 올려주기도 하지만, 조선의 정규군은 정병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지도 않았고, 이들이 복무지로 이동하는 동안 사용하는 여비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설령 군공을 세운다 하더라도 별반 혜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승진은 극소수의 엘리트 군인 계급인 갑사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조선에서는 수군(水軍)이나 조군(漕軍)과 같은 고된 일에 복무하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이 일은 일부 계층에서만 세습되는 일로 전락하여 신분은 양민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천민과 같은 신량역천의 직업이 생겨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 임진전간행위원회(壬辰戰刊行委員會), 1974
◎ 『한민족 역대 전쟁사』, 전쟁기념사업회, 1992
◎ 임철호, 『설화와 민중의 역사의식』, 집문당(潗文堂), 1989
◎ 김성남,『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 2005
◎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1987
◎ 『국역 조선왕조실록 CD-ROM』, 조선왕조실록CD-ROM간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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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륭한 자료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 0070***
    (2010.01.16 22: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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