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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계의 역사]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하고 싶은 말

2006년 방통대 1학기 세계의 역사과목의 레포트입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심층적 고찰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1. 서론


2. 루소의 생애


3. 루소의 정치 사상


4. 중심 사상 정리 - 사회계약론


5. 중심사상에 대한 자신의 입장


6. 결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사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가정, 학교, 직장, 국가 등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한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 한번쯤 의문을 가져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인간은 왜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으므로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그러면 사회는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생겨나는가? 그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사회가 생경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동물들이 이루는 군집의 형태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약속, 즉 계약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문제가 된 것은 어떠한 계약이 바람직하며 정당한 것인가이다. 그것은 국가로 보자면 정치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바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다.

2. 루소의 생애
쟝 자크 루소(Jean Jadques Rousseau)는 1712년 6월 28일, 아버지 이삭 루소와 어머니
쉬잔느의 차남으로 주네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종교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이주해온 이래 거의 100년 이상이나 즈네브에서 살았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하지 못하여, 시계공인 아버지의 노력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면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루소가 태어난 지 불과 9일만에 어머니 쉬잔느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의 수많은 불행 가운데서 최초의 것이었다"고 직접 술회하고 있듯이 그가 일생 동안 겪은 개인적인 불행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형과 함께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숙모가 알뜰히 보살펴 주었다고는 하나, 갓난아기 때부터 어머니를 모르고 자란다는 것은 그에게 참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독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게다가 감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루소는 어릴 때부터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일고여덟 살 되던 때부터 그는, 평소에 책을 좋아했던 그의 아버지와 함께 소설과 역사책 등을 읽기 시작했다. 뒷날 그는, 이때의 독서 덕택으로 스스로의 자의식을 끊임없이 전개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역사책 가운데서도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을 즐겨 읽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막연하게나마 '자유롭고 공화주의적인 정신'을 감지하게 했다. 이러한 독서는, 그뒤 그가 차가운 세파에 부딪치면서도 스스로의 안목으로 사회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계기를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열 네 살 되던 해, 아버지 이삭은 군인과 싸움을 벌인 끝에 집을 나간 뒤 영원히 즈네브를 떠나고 말았다. 이어서 형마저 집을 떠나 버리니, 루소는 그만 가정을 잃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외삼촌의 주선으로 즈네브에서 약7킬로미터 떨어진 보아세 마을에 있는 랑베르셰 목사에게로 가서 거기서 약간의 초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열 세 살이 되자 그는 조각가의 도제로 들어갔다. 이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횡포와 속박이 뜻밖으로 지나쳐 많은 고통과 번민 속에 허덕이다가, 열 여섯 살이 되자 그는 그곳을 떠나 모험과 방랑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3년 동안 그는 스위스와 프랑스 각지를 유랑하면서, 때로는 급사 노릇도 하고 때로는 가정교사나 음악교사를 하는 등 손에 잡히는 대로 갖은 일을 다해 가면서, 사정이 허락하면 머무르고 안되면 또 예정도 없는 방랑을 계속했다. 도제 생활과 방랑 생활을 하는 동안 루소는 극히 무질서하고 번민에 찬 생활 속에서 방황했지만, 이때의 생활에서 그는 뒷날 그의 사상의 방향을 결정짓는 귀중한 사실들을 체험했다. 비록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고아에 불과했지만 선량한 마음으로 착실히 일하려고 했던 그에게 주어진 도제제도의 부조리와 주인의 횡포, 절대주의 아래에서 거리낌없이 자행되었던 특권 계급의 온갖 타락과 만행, 그 밑에 짓밟히고 있던 수많은 민중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감정과 의지 등을 체험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는 자연과 인공, 선량한 인간의 본성과 사회 제도, 민중과 특권 계급, 감정과 이성 등 일련의 대립적 개념이 형성되어 갔다. 1731년 그가 열 아홉 살 되던 해, 그는 오랜 방랑 생활 끝에 샹베리의 바랑 부인을 만나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생애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면서 사상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바랑 부인에게서 어릴 때 느껴보지 못한 모성애를 느꼈고, 그리하여 그녀는 그에게 '친절한 어머니'였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바랑 부인과 지낸 10여 년 동안 그는 몇 차례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성직자가 되려고 생각했다가, 음악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음악을 공부하여
성가대 지휘자가 되고자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여의치 않자 그는 1735년 독학을 열심히 하고 샹베리에서 멀지 않은 샤르메트에 가서 독서에 열중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로서는 스스로를 교육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때 그는 볼테르를 비롯하여 많은 플라톤, 데카르트, 로크, 라이프니츠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그 밖에도 음악, 문학, 자연과학 및 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소양을 쌓았다.
1740년 루소는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 몽테규의 비서가 되었다. 정치에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상당한 기대를 건 그는 열심히 그리고 의욕적으로 일했다. 형식적으로는 비서에 불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사의 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대사는 루소를 건방지다고 생각했고, 루소는 대사의 무능하면서도 오만하고 게다가 불공정한 태도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루소는 1년 만에 면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에서 루소는 정치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처럼 평판이 좋은 정부의 결함에 주목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은 결국 정치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 그리고 국민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정부의 성질에 따라 제한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사회 현상은 결국 정치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어릴 때부터 받은 온갖 천대와 멸시도 인간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사회제도의 정치와 부조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선량한 본성과 자연적인 감정, 천부의 자유를 토대로 해서 올바른 사회질서만
정립된다면 사회의 모든 부조리는 제거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사회질서와 정부를 정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순수한 감정과 자유의 혼이 그의 가슴에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그는 "정치제도론"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19년이라는 긴 세월 끝에 "사회계약론"이라는 작은 작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루소는 또다시 실의와 역경의 밑바닥을 헤매게 되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으며 병까지 걸려 신음했다. 이때 그의 유일한 위안은 그보다 아홉 살 아래인 세탁부 테레즈 르바쇠르와의 관계였다. 그러나 이 관계 역시
비정상적인데다가 경제적인 곤란마저 겹쳐, 1746년부터 1755년 사이에 태어난 다섯 명의 아이를 그들은 모두 고아원 문앞에 내다버릴 정도였다.
그러던 가운데 1749년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발달은 도덕의 순화에 기여했는가?"라는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모집 문제를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는 무수한 광명, 강렬한 관념이 한꺼번에 몰려와 형용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질 지경"이었다. 격렬한 충격과 번득이는 영감을 얻은 그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인데 인간이 만든 문명과 제도 때문에 폐단이 생기고 따라서 사회 조직과 학문, 예술을 발달은 도덕의 순화에 기여하기는커녕 온갖 모순과 타락과 부패를 초래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글을 썼다. 그로부터 일년 뒤 그의 "학문과 예술론(Discours sur lis sciences et les arts)"는 당당히 당선되었다. 이에 대한 평가로 파리 전체가 온통 떠들썩했고, 루소는 일약 시대의 '풍운아'가 되었다. 그 뒤 그는 다시 디종의 아카데미가 내건 현상모집 문제 "인간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응모했으나 낙선되자, 그것을 그는 1755년 "인간불평등기원론(Diacours sur l`origine de l`negalite parmi les hommes)"으로 출판했다 인간 상호간에 생기는 불평등은 자연적 불평등과 사회적 불평등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그것은 토지의 소유, 즉 사유재산에 따라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해 그는 "백과전서(Encycopedie)"에 "정치경제론(De l`economie politique)"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사상적 입장을 하나 하나 정리해 갔다. 일단 명성을 얻자 루소는 다시 자기 교육을 위하여 파리 근처의 엘미타쥬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많은 방문객들 때문에 '매력 있는 고독'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새로운 작품 "신 엘로이즈(Nouvelle Heloise)"를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1761년 출판되자 마자 대단한 인기를 얻어 1800년까지 72판을 거듭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루소는 디드로와 달랑베르 등 이른바 '백과전서파'들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개인적인 감정의 차이도 있었지만, 서로가 지향하는 사상의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그는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친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절교한 뒤 엘미타쥬를 떠나 근처에 있는 몽루이로 옮겨 갔다.
몽루이로 옮겨온 1758년 이후로 그는 저작에 전념하여 1761년 여름에는 "에밀(Emile)"과 "사회계약론(Du contract social)"을 완성하였다. 이 두 저작은 루소를 불멸을 사상가로 만들어 주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에게 심한 박해를 가져다 주었다. 위대한 사상은 언제나 현실의 변혁을 지양하고, 그

태그 방통대, 장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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