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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고전의이해2A) 징비록 유성룡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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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가장 인상적인 구절
2. 징비록에 대한 서평
3. 징비록에 대한 줄거리
4. 징비록 독후감1
5. 징비록 독후감2
Ⅲ. 결 론-나의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우리나라에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할 전쟁이 6·25와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에 의하여 많은 백성이 희생을 당했다. 그것을 경계하고 후세에게 두 번다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쓴 책이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이다. 《징비록》은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 역사에 드물게 보존되어 온 기록문학이다. 그 내용은 임진왜란 이전의 국내외적 정세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 그리고 전쟁 이후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를 체계적이며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1592년 왜군은 조선을 침략,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약탈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하던 왜군의 기세는 평양성에서 멈췄고, 명나라 군대의 개입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이순신 등 뛰어난 장수들의 노력으로 왜군은 후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에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침략은 재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전쟁 당사자인 조선과 일본 그리고 참전국인 명나라, 명나라와 경쟁하던 청나라 등의 전쟁 관련국들에게도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다만 전쟁의 직접 피해자인 조선 정권은 붕괴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이 《징비록》에 동영상처럼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징비록》의 저자인 유성룡은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고, 25세(1566년)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도 총괄했다. 선조가 난을 피해 개성으로 갔을 때 영의정이 되었고, 평양에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고,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 군비 강화와 인재 양성을 도모했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군의 동태를 수상히 여겨 정읍 현감인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천거했고 형조정량으로 일하던 권율을 의주 목사로 천거했다. 그가 나이 50이 넘은 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전격적으로 좌수사로 천거할 수 있었던 이유엔 그의 안목과 나라에 대한 걱정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어릴 적 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일찌감치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을 늘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이 장에서는 자신의 유형에 속한 책들 중 한 권을 선택하여 읽은 후 다음 지시에 따라 과제를(유성룡, 징비록을 읽고)전반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2024-04-27 08:44:35 211.234.109.229/data/data_scrap.html 최근 수정일: 2019-11-06 15:55:18. 총퀴리수 : 3 총쿼리시간 : 0.00228 [0.00047]/[ DB:report] select count(*) AS CNT from psCart where SessNum='20240427084435900476'; [0.00056]/[ DB:report] SELECT seq FROM psRlist WHERE rpID=754232; [0.00125]/[ DB:report] SELECT * FROM psReport WHERE rpID=754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