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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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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초정 박제가

Ⅱ. 박제가의 생애와 학풍

Ⅲ. 박제가의 예술성과 성품

Ⅳ. 정조의 인재등용관과 북학파

Ⅴ. 조선 시대의 신분제에 대한 박제가의 견해

Ⅵ. 18세기 학풍과 북학의의 의의

Ⅶ. 박제가와 북학의

Ⅷ. 박제가가 제시한 상공업 진흥책과 소비 이론

Ⅸ. 박제가의 개혁안의 한계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 박제가의 생애와 학풍

박제가는 1750년 서울에서 승지(承旨) 박평의 서자로 태어났다. 11세 때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시(詩)·서(書)·화(畵)에 능했고, 19세 때에는 박지원(1737~1805)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실학을 익혀 실학자로 성장했다. 박제가는 그의 나이 26세 때인 1776년에 이덕무(1741~1793), 유득공(1749~1807), 이서구(1754~1825)가 함께 쓴 시집 『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의 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 뒤 박제가는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올 수 있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세 차례나 더 청나라를 방문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청나라 학자들과 만나 청의 문물과 제도를 살피는 과정에서 조선 사회가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이유를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보고 느낀 것을 하나씩 기록해 『북학의』를 탄생시켰다.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에는 주로 청나라에서 보고 배운 편리한 문물에 관한 이야기가, 「외편」에는 청나라와 조선의 제도 개혁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1779년 정조가 서자 출신 가운데 뛰어난 인재를 뽑아 쓰는 인재 등용책을 실시하면서, 박제가는 규장각 검서관(조선 후기 규장각의 실무 담당자.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과 왕의 초상화 관리, 왕의 행차 수행, 책의 간행 등을 담당했음)으로 임명되었고, 1794년에는 영평 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무렵 정조가 농업 진흥책이 담긴 훌륭한 농사 책을 구하자, 그는 「내편」과 「외편」의 내용을 요약·정리해 「북학의 진소본」, 곧 「진북학의」라는 글을 올렸고, 이를 다시 「내편」·「외편」과 함께 묶어 『북학의』로 펴냈다. 그러나 그는 보수적 집권파의 눈 밖에 나면서 1801년 경원으로 유배당했고, 1805년 10월 박지원의 죽음을 애통해 하다가 병석에 누운 뒤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2024-04-19 12:34:13 211.234.109.229/data/data_scrap.html 최근 수정일: 2019-11-06 15:55:18. 총퀴리수 : 3 총쿼리시간 : 0.00277 [0.00058]/[ DB:report] select count(*) AS CNT from psCart where SessNum='20240419123413442737'; [0.00085]/[ DB:report] SELECT seq FROM psRlist WHERE rpID=710751; [0.00134]/[ DB:report] SELECT * FROM psReport WHERE rpID=710751;